조국근대화물결의중심에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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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구 명예회장의 나이 30세이던 1961년, 5·16혁명이 일어나 군사정부가 탄생했다.
그때 명예회장은 육군 소령이 되어 있었다.


군사정부는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경제개발과 자주국방을 외치면서 실천적인 개발시대를 열었고, 이후 20년 가까운 기간을 같은 체제를 유지하면서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번영을 실현했다.
박정희 정부는 정책적으로 군을 앞세워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당시의 한국정부로서는 국토건설에 투입할 대규모의 재원을 확보할 길이 요원했다. 그러나 군에서 공사를 떠맡을 경우라면 문제가 달랐다. 미국에서 한국군에 대해 대폭적인 재정적 지원을 계속했기 때문에 마음놓고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기에 이인구 명예회장은 중견 공병장교로서 국토건설계획 수립과 사업추진 대열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중 핵심부문이라 할 수 있는 국토건설부문의 사업계획 골격을 이명예회장이 마련했던 것이다. 또한 한강수계 홍수피해 통제계획을 수립하고 한강수해 경보시스템을 완성하는 일도 이명예회장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군사시설의 현대화 계획도 이명예회장의 작품 중 하나다. 그 때까지만 해도 군막사는 천막시설이 아니면 흙벽돌 막사가 고작이었다. 그런 기존개념을 허물고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 할 만한 콘크리트 기초에다, 시멘트 블록벽, 목조 트러스에 시멘트 기와지붕 형식으로 된 표준막사를 설계하여 번듯하게 완성시켰다.

오늘날 가장 흔히 쓰이는 시멘트 블록은 이때 미국서 처음 도입한 신종 건축자재로서 군에서 먼저 도입하고 그 후 민간기업에 전수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50여 년 전의 일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는 기간 국도개량 및 포장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천안∼대전∼대구 구간을 연결하는 도로와 서울∼청평∼춘천을 연결하는 국도, 그리고 춘천∼홍천∼원주를 연결하는 국도를 동시에 착공하는 거대한 프로그램이었다. 서울∼부산간 도로만 해도 좁고 꼬불꼬불한데다가 거의가 포장이 안된 자갈 도로였다. 이것을 넓히고 바로잡아 전면 아스팔트로 포장한다는 계획이 성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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