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담보로한위기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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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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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구 명예회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준비작업이 마무리단계에 이르던 1967년 12월 30일, 공병 중령으로 제대한다. 미국 공병부장 노블 소장이 정년퇴임을 하면서 이인구 중령에게 제대하여 미국에 가서 건설경영수업을 받을 것을 권유해왔다. 장비와 운영에 필요한 차관을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서른여섯, 무엇이든 벌여볼 만한 나이였다.


이인구 명예회장은 제대 직후 잠시 도미, 300만 달러를 차용하는 데 성공했고, 이 돈을 가지고 귀국하여 동아중건설에 투자한다. 전무로서 회사 경영에 일부 참여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신장비를 앞세워 남산터널을 시공하는 등 전도가 밝았으나 뜻하지 않은 내홍(內訌)으로 인해 도산하고 만다. 크게 헛발을 디딘 이명예회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69년 유풍기업이라는 중장비대여 및 골재생산 회사를 세워 몇 개월간 운영을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 1월 오늘의 계룡건설의 모태가 된 계룡건설합자회사를 인수, 재설립하여 이번에는 대전·충남지역의 건설사를 새롭게 써나가기 시작한다. 군 복무기간 중의 각종 건설공사에 대한 설계, 시공감독 등의 풍부한 경험과 기술축적은 그의 마음을 움직여, 건설회사를 창립하고 건설회사를 이끌어가는 절대적 동인(動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건설역군의 기치(旗幟)를 드높이 펄럭이며 출발을 했던 이인구 명예회장의 앞길에는 커다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초창기의 어려움이야 누구나 겪는 것이라지만 그 시련은 너무나 빨리 현실로 다가왔다. 건설에 관한한 남다른 경험과 선진기술 도입능력을 가졌다는 점을 과신한 탓이었다.공사수주보다 어려운 문제가 자금동원이었다. 수주액 면에서는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 늘어났는데도 자금압박은 이명예회장을 옥죄었다. '자금압박'이라는 밧줄이 하루가 다르게 온몸을 조여오는 냉엄한 현실 앞에 수시로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 현실 앞에서는 의욕도, 절규도 부질없었고 남다른 건설경험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시 삼십대 후반의 이인구 사장은 새벽잠을 깨고나면 그날 도래한 어음을 막는 데 고심해야 했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모든 계획을 접어두고 자금조달에 매달려 은행, 사채업자,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사정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야 했다. 그런 날이 점점 잦아지더니 나중엔 그것이 일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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