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동란이맺어준건설과의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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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인구 명예회장은 교관후보생에 1차로 선발되어 미국 워싱턴 근교에 있는 미 육군공병학교에 파견되었다. 거기서 이명예회장은 각종 토목공사를 수행하는 중장비교육, 토질공학, 각종 건설공사 등 건설 전반에 관한 실무교육을 받았다. 교육수료 후 이명예회장은 한 트럭도 넘는 교범(敎範)들과 영화필름을 싣고 돌아와 김해 육군공병학교와 진해 육군대학을 오가면서 건설 관련 전공교육을 맡는다.

현대식 중장비가 한 대도 없던 우리나라 공병에 중장비가 도입되고 오늘날 각 시험소와 학교에서 실습하는 토양공학적 실험실 기구가 도입되어 실무교육을 하게 된 것은 이때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만큼 이명예회장은 공병의 현대화를 이끈 제1세대의 선두주자로서 지금도 '우리나라 건설사(建設史) 상 현대공법 도입의 원조적 역할을 해냈다'고 자부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공인받고 있는 국내 건설사도 겨우 소형 불도저 한두 대 갖추고 있었을 만큼 열악했던 시기였다.


이렇듯 한국 건설사의 일부를 써가게 된 이명예회장은 큰 공사, 어려운 공사, 한미합동으로 행하는 대형 사업에는 예외없이 선발되어 관여하였다. 미국으로부터 불도저, 그레이더, 덤프트럭, 스크레이퍼 등 중장비가 한국군 공병에 도입되었고 공사의 대부분을 군이 도맡아하다시피 했다. 학생시절에 선망하던 문학인이나 정치외교관이 되겠다는 희망이 갈수록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건설개척의 길에 묻히다보니 이명예회장 스스로도 점차 그 체질에 융화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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