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발전을위한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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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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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그리고여의도재입성

이같은 탁월한 국정수행능력에도 불구하고,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3당 합당이라는 악재와 노태우 정권의 실정이 겹쳐 민심(民心)은 급류를 타듯 돌아서고 있었다. 결국 이명예회장은
그 거센 역류(逆流)에 밀려 1992년 3월 선거에서 근소한 표차로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선거 패배 이후에도 이인구 명예회장의 지역발전을 위한 활동은 계속되었다. 사비(私費)를 들여가면서까지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업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했고, 계룡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등 기업이익의 사회환원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다.

그렇게 와신상담하며 명예회복을 노리던 끝에, 1996년 4월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유있는 표차로 당선된다. 여의도 재입성후 15대 국회에서는 3년 연속 예산결산특별위원으로 선정되었고 한보 청문회 간사로 활약하였으며, 그간의 활동을 인정받아 자민련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이와 같이 의정활동을 활발하게 벌임으로써 이인구 명예회장은 각계 인사들과 지역민들에게 '일하는 국회의원', '정열적인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또 1998년 국정감사때는 피감기관으로부터 정무위원회 베스트의원으로 뽑혔고, 여야의원들이 자체선정한 '98국감 20인'에도 들었다. 특히 1998년 6월 한국유권자운동연합에서 실시한 제15대 의정활동 평가에서 299명의 국회의원중 10명 안에 듦으로써 그 활약상을 보다 확실히 인정받았다.
이인구 명예회장의 활동이 더욱 돋보이는 점은 '화려한 말잔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역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사실에 있다. 실물경제의 전문가답게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 하나하나 해결점을 제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좋은 예로 엑스포기념재단의 해산 및 관련재산의 대전시의 국고예산을 1997년 1조 4천 360억원에서 1999년 3조 6천 750억원으로 무려 255%의 예산증가를 확보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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