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이 창립 50주년에 맞춰 계룡의 50년 역사 기록물인 ‘기념책자’와 ‘기업사사’를 발간했다.
1970년대 대한민국 근대화의 여명기를 맞이하며,
1970년 2월 계룡건설합자회사 설립으로 시작된 계룡의 50년 도전과 변화의 히스토리를
앞으로 4회에 걸친 타임라인(1970년대-1980년대-1990년대-2000년대) 포토 시리즈를 통해 조망해본다.
그 첫 회가 계룡의 1970년대 모습이다.
1970년, 공병 1세대로 군 생활을 마친 이인구 회장은 계룡건설합자회사의 인수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해 1월 20일, 12평짜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던 날은 바로 계룡건설의 창립기념일이 되었다. 이후 2월, 발기인회를 새로 구성하고 회사의 재창업을 실시한 계룡건설합자회사는 무한책임직원으로 이인구 회장을 선출한 뒤, 같은 해 4월 건설업 면허를 그리고 2년 뒤 전기공사업 면허를 취득하며 종합건설업체를 향한 시동을 걸었다.
대형 건축공사 수주는 물론, 규모 면에서도 건축 시공기술을 향상시키며 성장기로 진입한 1977년 9월, 계룡건설합자회사는 대전시 중구 문화동에 계룡맨션아파트(18평형 90세대)를 처음으로 자체 분양했다. 계룡맨션아파트는 대전 최초의 민간 맨션아파트였으며, 회사의 첫 번째 아파트 사업이기도 했다. 국내에 모델하우스가 낯설던 시기, 골조 공사가 완성될 즈음 1층에 내부시설을 완료한 후 시민들에게 아파트를 선보이며 이목을 끌기도 했다.
대전공설운동장 신축공사는 당초 시공을 맡았던 건설업체가 전국체전 개막 6개월을 앞두고 도산하며 중단되었다. 당시 충남도는 국내의 내로라하는 건설업계 곳곳에 공사를 맡기고자 하였으나 공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이에 이인구 회장은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 공사를 강행했으며, 완공 목표일보다 며칠 앞당긴 1978년 9월, 국내 최초로 캔틸레버 구조로 설계 시공된 주경기장을 건설했다.
1979년 8월, 서해안 대홍수로 충남 서천 종천방조제(789m)가 무너져 이를 응급 복구한 것은 오늘의 계룡건설을 있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바닷물이 덮쳐 농경지 200㏊가 침수됐는데, 13일 후 다음 만조 때까지 복구를 해야 했다. 정부는 이 기간 내 복구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계룡건설은 무상으로 복구공사를 맡겠다고 자처했다. 공사과정에서 불도저 한 대가 흙더미 속에 매몰됐는데, 공사가 지연될까봐 불도저를 포기한 일화는 지금까지 회자된다. 복구공사가 끝나고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는 계룡건설에 표창을 수여했다.
계룡그룹의 뿌리가 된 1970년대 이후 중부권 최대 건설기업으로 자리매김한 1980년대 계룡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다음호에서 공개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