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동란이맺어준건설과의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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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그 즈음 육군본부로부터 공병장교 5백명을 급히 양성 배출하라는 특명이 하달되었는데, 그 대상에 이명예회장이 포함되어 당장 장교가 되어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 때가 1950년 10월경이었다. 학도병으로서 급박한 전선의 한 곳만이라도 지킨다는 생각을 했지 장교가 되어 끝까지 군에 남아 있을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서울이 수복되면 학교로 돌아가리라 마음 먹고 있었던 이명예회장이었기에 장교임관을 거절했다. 장교가 되기에는 나이제한에도 걸렸다. 장교 신분령에 만 20세 이상의 청년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품신을 해 보았지만 상부의 지시는 한결 같았다. 그동안 미 군사고문관(소령)의 통역을 맡았던 것이 빌미가 되었다. 미군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국군이 거의 없어 애를 먹고 있던 형편에서 그는 기왕이면 이명예회장이 장교로 임관하여 보다 핵심적인 일을 해주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의 강력한 주문을 한국군 상관들로서는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2개월의 훈련을 받고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임관한 이인구 소위에게는 미 국방성에서 보내오는 각종 훈련서적들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또 그것을 선배장교 교관들에게 교육시키는 임무가 주어졌다. 낮에는 교관, 밤에는 번역이라는 1인 2역을 해내야 했다. 강건한 체질의 이명예회장이었지만 쏟아지는 업무량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아침에 코피를 쏟기가 다반사였고 번역을 제 시간에 맞추지 못해 기합도 여러 번 받았다.

어느덧 전황은 반전되어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9·28 수복, 압록강 혜산진 점령 등 승전보가 계속 날아들어 전쟁이 곧 끝나는 듯했으나, 때아닌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적군에게 내주는 1·4후퇴를 겪는다. 그 후 진퇴를 거듭하다가 수원∼강릉을 연결하는 노벰버 방어선에서 전세가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었을 즈음, 미 국방성에서는 한국군 정예화 계획의 하나로 미 육군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정예장교를 파견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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