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동란이맺어준건설과의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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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구 명예회장은 아버지와 동생 헌구(전 대전시 서구청장), 작은아버지 그리고 집안 아저씨와 3∼4일 분의 식량을 챙겨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대전에서 흑석리∼산내∼금산∼영동∼추풍령∼김천을 지나 대구까지 피란행이 이어졌다. 가는 곳마다 난민들로 들끓었다. 전황은 더욱 악화되어 7월 하순이 되자 대구역 뒤편에까지 박격포탄이 떨어지고 대구 시민들에게도 피란을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적군의 남하속도가 너무 빨랐다. 국군이 이렇듯 무기력한가 원망을 하는것도 잠시 '이제 더 남쪽으로 쫓겨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에 굳은 결심을 한다. 이명예회장은 가족의 간곡한 만류를 무릅쓰고 대구에서 만난 몇몇 학교 친구들과 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할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전쟁터에 나가는 일은 아무리 순수한 열정과 뜨겁게 솟구치는 젊은 피가 있었다고 해도 남다른 용기를 필 요로 하는 것이었다.


대구와 경산 간에 있는 고산국민학교에 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그곳으로 갔다. 여기저기서 합류한 학생은 64명에 이르렀다. 모두 "救國(구국)"이라는 혈서를 쓰고 자원입대했다. 그 부대는 그때 막 설치된 공병훈련대였으며, 이것이 바로 이인구 명예회장의 일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건설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사진 입대 직후에도 이명예회장의 부친은 안면이 있던 소속 중대장을 찾아가 장남을 돌려줄 것을 사정사정하여 허락을 받아내기까지 하는 등 부모의 애틋한 심정에서 사지로 가는 장남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이명예회장은 오히려 부친을 설득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입대 3일밖에 안된 학도의용군을 전투에 투입할 만큼 상황은 급했다. 다행히 이인구 명예회장이 투입된 부대는 야간 백병전까지 치르는 혈투 끝에 영천방어에 성공했다.

전우들과 군가를 소리높여 부르다보니 이상하리만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후 원대복귀한 이명예회장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다. 불시에 급박하게 수요가 발생하는 공병 신병훈련 교육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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